우남 이승만 연보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두 형이 이승만 출생 이전 사망, 6대 독자
서울로 이사. 남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 우수현(雩守峴)에서 성장
신긍우(申肯雨)의 권유로 Henry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
이종일(李鐘一)과 함께 『뎨국신문』을 창간, 주필로 활동
주시경(周時經, 본명 周相鎬)이 건네준 총을 들고 최정식(崔廷植), 서상대(徐相大)와 함께 탈옥을 기도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이송
옥중 생활 중에서도 『뎨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기고
옥중 도서실을 개설하여 운영
출옥 후 남대문 인근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
대한독립 보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측근 민영환의 밀명을 받고 미국으로 출국. 일본 고베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 윤병구와 합류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등을 경유하여 워싱턴, D.C.에 도착
뉴욕 동쪽 Oyster Bay의 Sagamore Hill ‘여름 백악관(Summer White House)’에서 윤병구와 함께 Theodore Roosevelt, Jr. 미국 대통령을 면담. 러일전쟁 종전을 위한 포츠머스회담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비협조로 외교공문 발송 좌절
Colorado주 Denver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The 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에서 의장으로 선출
Princeton University 박사과정 입학
Princeto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음.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은 1912년 , Princeton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
미국 Minneapolis, Minnesota에서 개최된 Quadrennial Gener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
한인기숙학원(Korean Boarding School for Boys)교장직에 취임
『한국교회핍박』 발간
월간『태평양잡지』 창간(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꿈)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민족대표회의(League of Small and Subject Nationalities)에 코리아대표로 참석
Paris Peace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미국 본토로 출발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League of Nations이 일제 치하의 코리아를 해방시켜 위임통치한 후 독립하는 방안을 Wilson 대통령에게 청원
상해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
서재필, 정한경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소극장’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 Independence Hall까지 행진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Paris Peace Conference 의장 Georges Benjamin Clemenceau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대통령 선언서’ 발표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설치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독립 지지 요청 연설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대통령 취임식 개최. 이후 5개월간 집무
워싱턴회의(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출항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단(Korean Mission) 조직(대표장: 이승만, 대표: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Fred A. Dolph).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9월 9일 한국대표단에게 워싱턴회의에 관한 전권 부여
워싱턴회의 미국대표단에 대한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 제출
만주사변 발발 후 만주국 문제가 외교적 쟁점으로 부상하자 하와이동포들로부터 외교자금을 조달하여 호놀룰루 출항
뉴욕에서 출발하여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제네바에 도착
(Liverpool, London, Paris, Lyon 경유)
코리아문제에 관한 문건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회원국 대표들과 특파원들에게 배포
만주문제와 관련된 한인 문제를 다룬 The Koreans in Manchuria를 서영해 등의 도움을 받아 Paris의 고려통신사를 통해 출판
뉴욕시 Lexington가(街)의 호텔 Moncler에서 제네바에서 만났던 Francesca Donner와 결혼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구미위원부 재건을 위한 시찰 및 준비활동 수행 (8월 10일 호놀룰루로 잠시 귀환)
Francesca와 함께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김
호놀룰루에서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외교위원장으로 위촉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Japan Inside Out이 각광을 받음.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Stanley Hornbeck, 대통령 Franklin Delano Roosevelt, 국무장관 Cordell Hull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
워싱턴 D.C.의 Lafayette 호텔에서 대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을 통해 독립투쟁을 고무하는 한국어, 영어 연설
OSS에 통보한 50명의 한국인 중 12명이 선발되어 군사훈련 시작
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 발송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Roosevelt 대통령과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제2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Roosevelt와 Churchill에게 Cairo Declaration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냄
미 국무차관 Joseph Grew에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냄
Yalta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함으로써(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 충돌
허헌, 이강국 등 좌익 인사들이 이승만을 방문,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요청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회담
독립총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총재가 됨
독립정부 수립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결성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국제연합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
Cairo Declaration과 Potsdam Declaration에 위배되는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합의 취소 요구 성명
독립정부 수립을 국제연합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도쿄를 거쳐 미국으로 출발
도쿄를 거쳐 상해에 들러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회견. 이청천 장군과 함께 귀국. 공항에서 김구, 김규식 등의 환영을 받음.
대동청년단 총재 취임. 단장은 이청천(李靑天) 장군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에 입주
국제연합 총회에서 국제연합 감시 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 결정
5.10총선에서 지역구인 동대문구에서 당선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186명 출석 가운데 180표 획득)
제3차 국제연합 총회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 승인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 파견(장면, 장기영, 김활란)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
맥아더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관 초청으로 일본 방문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
장개석과 진해에서 회담
농지개혁법 개정법 공포.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 계기(4월 5일 농지분배 예정통지서 발송 시작)
6.25전쟁 발발. 조선인민군의 전면적 기습 공격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 맥아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
한국군에 38선 이북 진격을 명령
서울시민에 피난 명령
개성에서 정전협상 개시. 백선엽이 한국군 대표로 참석
연안수역 보호를 목적으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 발표. 이후 이승만이 ‘한일 양국의 평화와 질서를 위한 평화선’으로 부름에 따라 ‘이승만평화선(Rhee Line)’으로 불리게 됨
6.25전쟁 2주년기념식에서 유시태의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배후인물 김시현 의원 체포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당선(부통령 이시영)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변영태와 John Foster Dulles가 서명).
서울로 재환도
대만을 방문하여 蔣介石 Chiang Kai-shek 총통과 반공통일전선 결성 발표
Dwight D. Eisenhower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후 정전협정은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 선언
이승만(자유당)의 대통령 당선 공고. 부통령은 장면(민주당)
제3대 대통령에 취임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
이북동포에게 메시지 전달
Ali Adnan Ertekin Menderes 터키 수상에 대한민국 1등 건국공로훈장 수여
원자력 연구 지시
이북동포들을 방송을 통해 위로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반공 메시지 전달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
경무대 앞에 도달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에 따른 시민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발표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 사임
국민이 원한다면 ① 대통령직 사임, ② 정·부통령선거 재실시, ③ 이기붕의 공직 사퇴, ④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약속.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호놀룰루 Maunalani 요양원에서 서거,